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비발디 (문단 편집) === 피에타 고아원의 음악교사 === || [[파일:ospedale1.jpg|width=500]] || || 가브리엘레 벨라(Gabriele Bella)가 그린 1782년 음악회. [br] 당시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파벨 1세|파벨]]이 베네치아에 방문했을 때 베네치아의 고아원이 연합한 음악회. || 1703년 9월, 비발디는 사제서품을 받은지 몇달만에 베네치아의 소녀 고아원 중 하나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a)[* 비발디 당시 베네치아는 자유와 유흥이 넘쳤던 도시로 그만큼 문란한 곳이었다. 때문에 사생아들이 상당히 많이 탄생했으며 이들은 운하 주변과 성당 근처에 버려졌다. 또한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계속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고아들도 상당히 많았다. 비발디 시절에 베네치아 수도원은 이 사생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고아원을 4개나 운영했으며 피에타 고아원이 그 중 하나였다.]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비발디의 공식직책은 사제였지만 딱히 근엄하거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으며 성무보다는 음악활동과 작곡에 더 힘을 기울였다. 당시 베네치아에 있던 고아원은 말이 고아원이지 상당히 규모가 크고 교육수준이 높은 교육기관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과정까지 모두 담당하는 일종의 종합교육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피에타 학교의 경우 학생과 직원을 합쳐 1천명이 넘었고 병원시설이 갖춰져 있고 고등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었으며 원생으로 구성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도 있었다. 이들 고아원은 가톨릭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았고 후원금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원생들과 직원에 대한 처우도 상당히 좋았는데, 음악교사로 부임한 첫 해 비발디의 연봉이 자신의 아버지의 연봉(15 [[두카트]])보다 무려 4배가 많은 60 두카트였을 정도. 비발디는 피에타 학교에서 금세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연봉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에 따라 그의 업무범위도 확대됐는데 공식적으로는 바이올린 교사였지만 얼마 후에는 실질적으로는 모든 악기를 총괄했으며 합창의 지휘와 감독도 했다. 직장 상사인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가 1713년 베네치아를 떠난 뒤로부터 비발디의 직함은 '합주 교사'로 바뀌었는데 진작부터 비발디가 음악관련 일은 다 맡아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발디의 노력 덕분에 피에타 학교의 음악수준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 피에타 학교의 음악실력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졌는데 베네치아를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이 피에타 학교의 연주회는 매우 중요한 볼거리였다. [[장 자크 루소]]도 참회록에서 베네치아 고아원의 음악 수준을 높이 평가했을 정도이며 1739년 프랑스의 여행가였던 샤를 드 브로스는 피에타 고아원의 음악수준이 파리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보다 낫다며 칭찬하기도 했다.[* 1739년이면 비발디가 이미 피에타 고아원을 떠난 시점이었지만 다행히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에타 학교의 음악적 명성은 날로 높아져서 1710년대에는 피에타 연주자와 합창단이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했으며 1715년에 피에타의 [[높으신 분들]]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50 두카트의 특별 하사금도 지급되었다. 피에타의 소녀 연주자들은 정기연주회를 열었고[* 다만 이때는 연주자들이 보이지 않게 커튼을 치고 연주했다.] 행사가 있을 때는 고아원들이 연합해서 성대한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비발디는 이 피에타 학교의 합창단과 연주자들의 공연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이 때 대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기교적으로 어렵고 기법적으로 대담한 곡도 많이 작곡하면서 비발디의 작곡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비발디는 이와같은 음악적 성과를 바탕으로 당시 고아원에 방문하시는 [[높으신 분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으며 1708년말에는 베네치아로 놀러온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에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집 Op. 2를 헌정했다. 예술 애호가로 이름높았던 프레데리크 4세는 베네치아에서 피에타의 연주를 자주 들었으며 돌아가서도 자신의 궁정에서 비발디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자주 연주시켰다고 한다. 비발디의 '붉은 머리 사제'라는 별명은 바로 이 피에타 고아원의 소녀들이 붙여준 것인데, 나중에는 이 별명이 조롱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지만 원래는 비발디를 존경하는 뜻에서 붙여준 애칭이었다. 한편 비발디가 본업을 사실상 팽개치고 음악에 몰두하자 교황청은 아예 비발디의 성직 집무권을 박탈해버리고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게 했는데,~~와 신난다~~ 사실 이 조치는 처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고 싶은 일 마음놓고 하라고 풀어준 것에 가깝다. || [[파일:20180730_161750.png|width=700]] || || 당시 프레데리크 4세가 베네치아에 방문했을 때 열린 왕을 위한 성대한 카니발. || 피에타 학교의 (음악적) 명성이 높아지고 학생들이 일등신부감이 된다는 이야기가 알려지자 원래 고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각지의 귀족과 부자들이 자기 딸을 데려와서 피에타 학교에 입학시켜 달라고 사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후술되는 비발디의 가수 안나 지로도 이런 식으로 피에타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